일단 소감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저는 편돌이입니다. 알바를 구하려던 찰나에 마침 근처 편의점에서 구인 공고를 냈길래 바로 지원했고,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죠. 아무튼, 오늘은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 때문인지 손님도 평소보다 적었고, 물류 양도 평소보다 현저히 적었던 터라 좀 쉬엄쉬엄 편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싱겁게 끝나면 편의점 알바가 아니죠. 저녁 돼서 뭔가 불량해 보이는, “난 미자지만 널 대놓고 속이겠다”라고 말하는 듯한 외양의 손님이 한 명 들어와서는 개당 19,000원이나 하는 일회용 전자담배를 하나 고릅니다. 저는 일단 젊어 보이니 신분증을 요구했습니다. 03년생이라고 찍혀 있는 사진을 보여주더라고요. 원칙적으로 사진은 인정되지 않음을 손님께 고지드리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보여줍니다. “나 성인이다”라는 거죠. 여기서 의심했어야 했습니다. 이 정도로 담배를 필사적으로 구매하려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돛대거나 미자거든요.
뭐 일단 저는 속는 셈 치고 일단 결제를 시도해 봤습니다. 신용카드인지 체크카드인지 확인하면 어느 정도는 거를 수 있으니까요. 아니 속는 셈 친 것도 아니고 반쯤 속았었습니다. 그 사람이 결제기에 토스유스카드를 꽂으려고 하기 전까지는요.
토스유스카드는 2021년 말에 출시된 토스뱅크의 “청소년 전용” 카드 상품으로, 발급 가능 연령은 7세부터 16세까지입니다. 즉, 이 카드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04년생, 그중에서도 12월 출생자라는 소리인데, 당시(2021년 12월) 기준으로도 그쯤 되면 본인 명의 계좌+체크카드는 어지간하면 갖고 있을 나이고, 자력으로 계좌와 체크카드를 만들 수도 있는 나이라 이 카드를 발급받을 이유가 딱히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04년생은 대학 들어갈 나이 or 취업할 나이라 재수생, 취준생 등이 아닌 이상 학생증 혹은 월급 때문이라도 본인 명의 계좌+체크카드를 발급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면, 이 카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99.9% 확률로 미성년자라는 소리입니다. 근데 그 토스유스카드로 담배를 사려고 하네요?
잡았다 요놈.
네. 그는 미자였습니다. 거기다 신분증 사진엔 03년생이라고 적혀 있었으므로 애초에 03년생이 맞았다면 그 카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조작했단 거죠. 일단 미자임을 확인했으니 전 급하게 결제를 멈췄습니다. 카드를 꽂기 전에 멈춰 세웠기에 다행히도 판매는 되지 않았고, 해당 카드로는 결제 불가하다고 안내하니 순순히 돌아가더라고요.
일단 신분증을 조작했으니 형법 제225조(공문서등의 위조·변조)나 제229조(위조등 공문서의 행사)로 재판장에 넘겨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이라 판례상 애매하기도 하고(위조 신분증이면 그 자리에서 뺏고 공문서위조 현행범으로 경찰 불렀을 겁니다.), 이미 돌려보내기도 했으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미자가 담배 뚫으려고 시도했으니 조심하세요” 하고 알리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뭐… 그래도 일은 안 났으니 다행입죠.
혹시라도 이 글 보시는 분이 편의점, 혹은 청소년 유해 물품을 취급하는 업종에 종사하고 계신다면, 일단 어려 보이면 의심하세요. 여러분 컴퓨터 노리는 랜섬웨어라고 생각하고, 일단 의심하세요. 이 케이스 같은 경우는 그 미성년자가 멍청했거나 절 물로 봤기에 망정이지, 작정하고 부모님 신용카드 뽀려오거나 성인도 만들 수 있는 체크카드 같은 거라도 내면 깜빡 속아넘어갈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의심하세요.
전 이제 사회복무요원 소집 전까지 할 새 알바나 구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의 실수로 인생 말아먹을 뻔한 제르엘이었습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학벌 살려서 과외나 할걸 하는 생각이 드네요. 뭐 학교를 정시나 학생부전형으로 간 것도 아니고, 여러 학생을 마주하면서 가르칠 정도로 사교성이 좋거나 한 것도 아니라서 과외를 해도 잘했을까 싶긴 합니다만.
+2) 그나저나 동네 꼬맹이들이 토스유스카드를 은근히 자주 쓰는데, 그거 플레이트가 꽤 예쁘더라고요. 뭐 어차피 전 성인이라 발급 못 받지만요.
+3) 원래는 가벼운 근황글이나 올리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올린다는 글이 이런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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